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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흥현청
  • 이곳은 예당저수지가 축조되기전 고려시대 대흥현청(지금의군청)이 있던 곳으로 어민회관에서 봉수산 (임존성)쪽으로 500m정도 올라간곳에 위치하고있다 복원된 현청건물이 드넓은 예당저수지가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곳에 위치하고있어 과거의 번창했던 대흥의 옛모습을 실감 할 수 있게 한다 (저수지 축조로 수몰지역이 많아 지금은 대흥면이 되었지만 그 이전에는 인근의 예산군보다 규모가큰 고을 이었다고함)
임성제문
  • 대흥군은 백제 때에는 임존성이었다가 신라에서 임성군으로 고쳤고 고려초에 비로서 대흥이라 불렀으며 명종 2년에 감무를 두게 되었다.조선 태종 13년에 현감을 두었다가 숙종 7년에 군으로 승격되었다 백제 시대 - 오산현 임존성 금물현으로 칭함 신라 시대 - 고산현 임성군 금무현으로 개칭 고려 시대 - 예산현 대흥현 덕풍현으로 개칭 조선 시대 - 예산군 대흥군 덕산군으로 개칭 1914. 3. 1 부령 제111호(1913.12.29 공포)로 예산·대흥·덕산군을 통합 예산군설치(12면) 현재 - 대흥면
이성만 형제 효제비
  • 충청남도 예산군 대흥면 동서리에 위치한 유형문화재 제102호인 효제비(孝悌碑)는 높이 142㎝ 폭 43.5㎝ 두께 25㎝ 조선초기 양식의 화강암 으로 세워져있다.
    이 비는 고려초 효자로 이름난 이성만과 이순 형제의 행적을 기리기 위하여 대흥면 동서리에 세웠던 것으로예당저수지가 생겨 수몰될 위기에 놓여 있던 것을 대흥면사무소 앞에 이전시켜 놓았다.
    형은 아우의 볏단에 아우는 형의 볏단에 밤중에 벼를 나르다 서로 만나는 내용으로 개편되기전 초등학교 교과서에 내용이 실리기도 하였으며 70년대 "형님먼저 아우먼저"라는 로고송과함께 모 라면 CF로도 그내용이 널리알려진바있다.

    전면[前面] 永樂十六年十一月初三日知申事河演敬奉王旨內節該義夫節婦孝子順孫訪問傳報向事各道巡回移忠淸道大興戶長李成萬李順木父母生時甘旨奉養又春秋滋饌父母所愛親戚以悅其心及沒兄守母墳弟守父墳朝則每兄至弟家暮則弟就兄家朝夕仝拱供食得一美味不集不食亦狀守啓向前孝子大興戶長李成萬李順木王召內旌表門閭子子孫孫亦小心謹守毋墜家風更加勉?示訓永世.
    (영락(永樂) 16년 11월 초 3일에 지신사(知申事) 하연(河演)은 삼가 왕지를 받들어 내절(內節)을 갖춘 오른 지아비와 절개있는 지어미와 효자와 순손을 방문하여 보고할 일을 드리노라. 각도를 순행하다 충청도에 이르니 대흥 호장 이성만과 이순목이 부모 생시에 단맛으로 봉양하고 또 춘추마다 맛있는 반찬을 가지고 부모가 사랑하는 친척들에게 분배해서 그 마음을 기쁘게 하였다. 몰함에 미쳐서 형은 어미의 무덤을 지키고 아우는 아비의 무덤을 지키며 언제나 아침에는 형이 아우의 집에 이르고 저녁에는 아우가 형의 집에 가서 조석으로 함께 이바지할 음식을 바치고 맛있는 것을 한가지라도 얻게되면 모으지 않으면 먹지아니하여 또한 장계를 올렸다. 효자 대흥 호장 이성만과 이순목을 왕이 불러 들이고 마을에 정문을 내리게 하여 자자손손이 또한 조심해 삼가 지켜서 가풍을 떨어뜨리지 말고 다시 힘쓰기를 더하여 교훈을 영세토록 보이게 하였다.) 좌측면[左側面] 弘治拾年丁丑二月 日立홍치 (弘治 10년 정축(丁丑) 2월 일에 세움.)
의좋은 형제동상
  • 대흥면사무소 효제비옆 동헌앞에 건립된 동상으로 두 형제가 볏단을 나르다 도중에서 만나는 장면을 실물보다 1.5배 큰 2.5m의 높이로 만들었다.
    추수가 끝난 가을 밤. 형은 동생이 새 살림을 시작했으니 필요한 것들이 많을 거라고 생각한다. 동생은 거꾸로 형이 식구도 많고 제사도 많이 치러야 하기 때문에 양식이 충분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두 형제는 고심 끝에 서로에게 양식을 보태주기 위해 밤중에 자신의 볏단을 몰래 나르다 도중에 만나 감격한 나머지 기쁨의 눈물을 흘린다. 갑자기 나타난 달이 부둥켜 안은 두 형제를 밝게 비춘다.는 내용으로 어린 시절 가슴을 뭉클하게 만들었던 ‘의좋은 형제’ 이야기의 주인공으로 고려시대 예산군 대흥면 상중리에 살던 실제 인물인 이성만 이순 형제를 기리기 위해 세워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