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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존성은?
  • 충남 예산군 대흥면, 예산군 광시면, 홍성군 금마면의 삼각지점에 위치한 해발 484m의 봉수산 정상에있는 산성으로 삼국시대 백제가 망한 뒤 유장 흑지상지 등이 유민을 거느리고 백제 부흥을 꾀하였던 곳이다.
    산의 정상에서 내려다보면 동북쪽으로는 무한천에서 예당 저수지를 거쳐 삽교천과 아산만으로 이어지는 물줄기를 한눈에 볼수있으며 남쪽으로는 공주 청양 부여로 이어지는 차령산맥의 구비구비와 홍성시내와 들녘이 한눈에 들어와 그 옛날 전략적 요충지였음을 한눈에 실감할 수있게한다성벽의 높이는 2.5m, 폭은 약 3.5m 가량이며 성 안에는 너비 7 내지 8m의 내호가 둘러져 있다.
    성 바깥벽은 돌로 쌓고 안은 흙으로 채운 내탁법(內托法)으로 축조되었으며 성안에는 평평하게 경사를 이룬 넓은 분지로 되어 있는데, 넓이는 약 268,600평이나 되며 계단식의 단축을 만들어 최대한 많은 주민을 수용할 수 있게 하였고 우물이 3곳이 있었다고한다.
    둘레는 2.8Km로 백제의 성으로 최대급 규모였으며 남쪽 성벽에 수구가 있고 성 안의 물을 수구로 이끌기 위해 폭 60m, 깊이 90cm의 도랑이 있고 그 위로는 넓적한 판석이 덮여져 있다. 성벽의 네 귀퉁이는 약간 더 높게 쌓았고 남문 터의 양쪽에는 거대한 장방형의 석축 구조가 남아 있다.
    이 산성은 서기 660년에 멸망한 백제가 부흥운동을 펼친 거점으로 주류성과함께 역사에 기록되어져 있으며 또한 후삼국시대에도 고려 태조(太祖)와 견훤(甄萱)이 격전을 벌인 기록이 남아있는 유서 깊은 곳이다.
임존성전투
  • 서기660년 7월18일 사비성에서는 나당군의 전승축하연이 열렸다.
    신라왕과 소정방 및 여러 장수들이 당상에 앉고 의자왕과 그의 아들 융은 당하에 앉아 의자왕으로 하여금 술을 따르게 하니 백제의 여러 신하들이 목이 메어 울지 않는 자가 없었다고 <삼국사기>에 전한다.
    서부 세력을 거느리고 의자왕과 함께 당에 항복했던 흑치상지는 이 전승축하연 이후 사비성을 탈출하여 10여명의 무리를 이끌고 임존성으로 들어가 항전 태세를 갖추었다. 그가 처음에 항복의 대열에 섰다가 왜 이탈하여 부흥운동의 기치를 들게 되었는가는 다음과 같은 추리가 가능하다.
    웅진성으로 도피해 있던 의자왕이 항복한 것은 7월 13일 사비성이 함락된 후 5일이 지난 7월 18일이었다. 그것도 웅진방의 영군을 데리고 웅진으로부터 와서 항복한 것이었다. 이에 흑치상지를 비롯한 여러 지방 성주들의 동참이 뒤따랐다.
    이는 백제와 당나라 사이에 어떤 타협이 성사되었음을 추측하기에 충분하다. 의자왕이 웅진성으로 피하기 전에 백제는 상좌평을 시켜 많은 음식을 보냈는데 소정방은 이를 거절하였으며, 왕의 서자가 6명의 좌평과 더불어 나와 죄를 빌었으나 정방이 이를 물리쳤다는 기록도 있다.
    흑치상지가 부흥운동에 나서게 된 동기가 "소정방이 늙은 왕을 가두고 군사를 놓아 크게 노략질 하였다.<삼국사기 열전 흑치상지전>"는 데 있었음을 고려하면 당군이 의자왕을 포로 취급을 하고 약탈을 자행한 것은 애초의 약속과는 달랐음을 말해준다. 흑치상지가 사람들을 불러모아 임존성에 들어가 의거하여 굳게 지키니 열흘이 못되어 들어오는 자가 3만명이 넘었다고 <삼국사기>에 전한다.
    이곳에서 그는 복신,도침과 함께 나당군을 몰아내기 위한 항전의 횃불을 올렸다.
    흑치상지가 임존성에 거점을 확보하자 백제의 의병들은 남잠성과 정현성을 근거지로 하여 나당군에 대항하였다. 한편 좌평 정무(正武)는 흩어진 군사들을 모아 두시원악(청양군 정산면)에 진을 치고 나당군을 공격하였다. 8월 26일 신라군은 임존성을 총공격하였으나 이기지 못하고 소책만 깨뜨리고 물러섰다.
    이후 난공불락의 요새 임존성은 주류성(한산이 일반적인 견해이나, 부안, 홍성 등이 제기되고 있음)과 함께 백제부흥운동의 중심거점으로서의 역할을 하게된다. 의자왕의 사촌인 복신과 승려도침, 지수신 그리고 흑치상지등 백제 부흥운동의 중심세력들은 주류성과 임존성을 거점으로 한때 크게 기세를 떨쳐 200여 성을 회복하기에 이르렀다.
    이들은 일본으로부터 왕자 풍을 맞아다가 왕으로 삼고(662.5), 사비성, 웅진성 등을 포위하여 주둔하는 당군을 괴롭혔으며, 여러 차례 당군과 신라군을 격파하였다. 그러나 이 부흥 운동은 복신이 도침을 죽이고, 풍이 또 복신을 죽이는 내분이 생겨 와해되었다.
    신라와 당의 연합군은 이 기회를 포착하여 부흥군의 본거지인 주류성을 함락시켰다.(663) 이때, 풍왕은 고구려로 도망가고, 부흥군의 최후의 거점인 임존성을 지키던 흑치상지가 당군에 투항하자 지수신마저 고구려로 망명, 임존성은 663년 11월에 함락되어 4년에 걸친 부흥 운동은 실패로 끝나고 말았다.
흑치상지(黑齒常之)
  • 백제의 달솔로서 풍달군(위치 미상)의 장수를 겸하고 있었다.
    현재 중국 남경대 박물관에 보관된 그의 묘비명에 "그 선조는 부여씨에서 나와 흑치에 봉해졌으므로 자손이 이를 따라 씨(氏)로 삼았다."라고 적혀 있다. 즉 그의 선조는 백제의 식민지였던 흑치국의 총독이었던 것이다.
    중국의 남부 월(越)에서 치아를 검게 물들이는 습속이 있다는 기록으로 보아 흑치국의 위치를 중국의 남부로 추정하기도 하고 오늘의 필리핀으로 보는 견해도 있다.
    그는 임존성을 거점으로 복신 도침등과 함께 백제 부흥운동을 주도하여 한때 위세를 떨쳤으나 부흥운동세력간 내부분열과 당나라 고종이 보낸 사신의 설득으로 항복하여 임존성 공략 때 자신이지키던 이성을 빼앗는 데 공을 세웠다.
    그 공으로 당나라에 가서 좌령군원외장군양주자사가 되고,678년 토번 정벌에, 681년 토번의 잔도 찬파토벌에 참가하였다. 그 뒤 돌궐의 정벌에 나서는 등 공을 세웠으나 그를 시기하는 당나라 신하들의 모함을 받고 옥에 갇혔다가 죽었다.
묘순이 바위
  • 임존성에는 성의 축조와 관련된 전설이하나 있다. 삼국시대 백제가 고구려 신라 당등 외부의 침략을 막기위해 이 성을 축조할 당시 이 고을에는 힘이센 장사 남매가 홀어머니와 살고있었다한다 그런데 그 당시에는 한집안에 장사가 둘 이있으면 나라가 망한다 하여 고을 사람들이 묘순이 어머니에게 둘 중 한명은 죽일것을 종용하였다.
    이에 견디다못한 어머니는 둘 중 한명을 죽일것을 결정하고 내기(시합)를 시켜 지는사람을 죽이기로하였다. 묘순이에게는 성을 쌓게하고 오빠에게는 한양(당시는 부여?)에있는 왕에게 성을 쌓았다는 보고를 하고올것을 지시하고 묘순이가 성을 다 쌓을 동안 오빠가 도착하게 되면 묘순이를 죽이고 오빠가 늦게 도착하게되면 오빠를 죽이기로 하고 시합에 들어간다.
    묘순이가 혼자서 열심히 성을쌓아 거의다 완성하려하자 어머니는 고심을 하게된다 그당시에도 남존여비사상이 있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어머니는 마지못해 한명을 죽이지만 그래도 아들을 살리고싶은데 한양으로간 아들은 소식이없고 묘순이는 성을 거의다 완성하고 성문만 남겨놓게 된것이다.
    이에 어머니는 꾀를 내어 묘순이에게 콩이많이 들어간 설익은 콩밥을 지어주고 힘들으니 먹고할것을 제안한다 생사를건 시합이지만 어머니의 정성을 뿌리치지못한 묘순이는 콩밥을 먹게되는데 설익은 콩인지라 잘 십히지가 않아 시간은 자꾸 지연되고 어렵게 밥한공기를 다 먹은 묘순이가 막 성문을 달으려는 순간 한양에갔던 오빠가 도착한것이다.
    그리하여 묘순이는 고을사람들에 의해 성문을 달으려고 자신이 깍아놓은 바위돌로 눌러서 죽임을 당하게된다. 그이후 언제부터인가 지금까지도 그바위를 두드리며 묘순아 무엇이 원수냐? 하고물으면 콩밥이 원수지!하며 흐느끼는소리가 들린다는 전설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