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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말기의 문신, 학자, 의병장

호는 면암 경기도 포천에서 태어나 1855년 문과에 급제하여 장령이라는 벼슬에 올랐다.
흥선대원군의 정책을 비판하여 여러차례 귀양살이를 하였고, 그 뒤 단발령 (조선 고종 32년에 상투를 없애고 머리를짧게 깎도록 한 명령)에 반대하여 다시 옥살이를 하였다.
1898년 경기도 관찰사등의 벼슬이 내려졌으나 거절하고 후진 교육에 힘썼다. 1905년에 을사조약이맺어지자 이듬해에 전라도에서 의병을 일으켜 일본군과 맞서 싸우다가 체포되어 쓰시마 섬으로 끌려간 뒤, 일본이 주는 음식은 먹을 수 없다 하여 단식하다가 세상을 떠난다.

저서로는 <면암집>이 있으며, 1962년에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이 주어졌다. 1906년 의병을 일으킨 최익현은 체포되어 임병찬, 유준근 등과 함께 대마도로 귀양을 가게 되었다.최익현은 단식으로 일제에 항거하면서 물 한 모금 마시지 않았다. 제자들이 눈물로 하소연했다. " 선생님, 이렇게 돌아가시면 나라의 앞날은 어찌합니까 ? 잡수시고 기운을 차려야 저들과 대항해서 싸울 수 있지 않겠습니까 ? " " 내 늙은 몸으로 어찌 원수의 밥을 먹고 더 살기를 바라겠느냐 ? 너희들이나 살아 돌아가서 나라를 구하라. " 최익현은 끝내 일본의 음식을 거절하다가 대마도에서 한 많은 일생을 마치고 말았다.


최익현선생 생가

그의 시체가 돌아올 때 수많은 동포들이 부산항에 나가 통곡하며 맞았다.
인근의 청양군에는 최익현사당인 모덕사와 동상이 건립되어있고 비교적 많이 알려져있으나 예산군 광시면 신대리에 그분의 생가와 묘가 있다는것은 많이 알려지지 않았다.

그래서인지 관리가 잘 되어있지는 않으나 봉수산의 남쪽 끝자락에 위치하고있고 예당저수지 동산교에서 1km남짓 거리에있어 이곳을 찾는 사람들이 눈여겨 찾아볼만한 곳 이기도하다.